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루이지(시칠리아)|루이지]]와 [[프리드리히 4세(시칠리아)|프리드리히 4세]] ===== 1342년 8월 15일, 칼라시베타 별궁에 지내던 페트루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4살 밖에 안 된 아들 '''[[루이지(시칠리아)|루이지]]'''가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고, 엘리자베타와 조반니가 섭정을 맡았다. 1343년 1월 20일, 프리드리히 3세 대부터 시칠리아 왕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던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가 사망했다. 사후 나폴리 왕위에 오른 [[조반나 1세]]는 여왕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통제하느라 시칠리아와의 전쟁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시칠리아 왕국 역시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고 흉흉한 민심을 달래야 했다. 그리하여 1347년 11월 7일, 양국은 카타니아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시칠리아 왕국의 독립은 유지되었지만, 루이지는 시칠리아 왕이 아니라 시칠리아의 고대 이름인 트리나크리아(Trinacria)의 왕을 칭하는 것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교황청과 여러번 갈등을 벌인 시칠리아 왕국을 이대로 끝장내고 싶었기에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1347년 겨울 [[중세 흑사병]]이 시칠리아를 강타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때 섭정을 맡고 있던 조반니 역시 흑사병에 걸려 1348년 4월 3일에 사망했다. 이후 조반니의 부관이자 카탈루냐 귀족이었던 블라스코 2세 데 알라고나가 섭정직을 맡았고, 조반니의 아들 페데리코는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해 6월 초, 엘리자베타 왕비의 신임을 얻어 정국을 좌지우지했다가 조반니와의 정쟁에서 패한 뒤 피사로 망명했던 마테오 팔리지 백작이 엘리자베타의 소환령을 받들어 시칠리아에 돌아왔다. 이후 마테오는 시칠리아 내 카탈루냐 출신 귀족들을 규합해 요직에 임명하고 토착 귀족들을 축출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토착 귀족들이 연말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칠리아는 내전에 휘말렸다. 루이지는 엘리자베타 왕비와 마테오에 의해 밀라초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무력하게 지냈고, 귀족들은 두 패로 나뉜 채 자신의 권익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사병을 동원해 상대방을 공격했다. 한편 흑사병이 섬 전역에 확산되면서 인구가 크게 감소했고, 세입은 20691 온즈(onze)에서 14405 온즈로 떨어졌으며, 수확량 역시 급감하면서 굶주림이 만연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던 지배층은 이 문제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민중은 절망과 비탄에 사로잡혔다. 14세기 역사가 가브리엘 드 무시스(Gabriel de Mussis)는 시칠리아인들이 폭우, [[샴쌍둥이]]의 탄생, 메시나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말 등 일련의 징조를 근거로 하느님이 시칠리아와 자신들을 저버렸다며 매일 무기력하게 지냈다고 기술했다. 1350년 9월 10일, 시칠리아 토착 가문과 카탈루냐 출신 가문들은 루이지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들은 왕이 성인이 되어서 분쟁을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1352년 2월 23일, 마테오는 이제 14살이 된 루이지에게 카타니아 사람들에게 통치를 시작할 의사를 밝히라는 편지를 쓰도록 강요했다. 아라곤 출신의 시칠리아 귀족이자 마테오의 정적이었던 블라스코 2세 데 달라고나는 8월 22일 궁정에 사절을 보내 이 서신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마테오를 규탄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흑사병이 만연한 상황에서 이 이상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10월에 평화 협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1352년 어머니 엘리자베타가 사망한 후 누나 에우페미아가 섭정을 맡았다. 1353년 6월 9일, 루이지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토착 귀족들을 진압하는 군대에 이끌려 메시나를 출발했다. 이후 타오르미나에서 엔리코 로소 백작의 영접을 받았고, 밀라초 평원에서 반군과 정부군이 대치하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타오르미나로 돌아갔다. 그해 6월 말에 사망한 동생 조반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메시나로 돌아갔으나, 7월 17일 민중이 폭동을 일으킨 후 엔리코 로소와 시모네 치이라몬테가 이끄는 토착 귀족들이 메시나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루이지에게 카탈루냐인들을 멸시한 마테오 팔리지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루이지는 이 요구를 거부했지만, 7월 19일 폭도들이 궁궐에 침입하여 마테오를 살해하자 궁궐을 탈출했다. 이후 카탈루냐 함대에 승산한 뒤 7월 29일 카타니아에 이동하여 블라스코 2세 데 알라고나가 이끄는 군대와 합세했다. 10월 2일, 루이지와 블라스코 2세는 반란군과 밀라초에서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후 두 사람은 10월 24일 카타니아로 후퇴했고 11월 8일 마테오를 살해한 자들을 반역자로 규탄했다. 이후 카타니아 외곽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반란군 역시 카타니아 공략에 실패했다. 이렇듯 내전이 장기화되어가던 1354년 4월, 조반나 1세가 파견한 나폴리군이 루이지에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손잡고 시칠리아로 침투해 팔레르모 등 시칠리아 내륙 대부분을 장악했다. 오직 카타니아와 메시나 만이 루이지를 여전히 왕으로 받들었다. 이후 조반나 1세의 남편이었다가 공동 왕이 된 뒤 여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 [[루이지 1세]]가 추가 병력을 보내기를 거부했기에, 루이지는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루이지는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치아라몬테 가문의 오랜 라이벌인 벤티미글리아 가문을 시종직으로 복직시키며 그들을 회유하려 했다. 11월에 군대를 친히 이끌고 시칠리아의 사장 서쪽에 있는 발 디 마자라 지방에서 캄마라타와 트라파니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1355년 5월 13일 렌티니 공성전을 벌였지만 6월 중순에 공략을 포기하고 카타니아로 철수했고, 7월 카타니아에서 흑사병이 또다시 유행하자 메시나로 피신했다. 이후 팔레르모를 상대로 공세를 벌였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 1355년 10월 16일 흑사병에 걸려 17세의 나이에 사망했고, 동생 [[프리드리히 4세(시칠리아)|프리드리히 4세]]가 시칠리아 왕으로 등극했다. 당시 왕의 나이가 14세에 불과했기에, 누나 에우페미아가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실권은 블라스코 2세 데 알라고나에게 있었다. 당시 시칠리아는 귀족들의 내전과 [[중세 흑사병]]으로 인해 피폐해졌고,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는 나폴리 왕국의 수중에 있었다. 1357년 에우페미아가 사망한 뒤 통치를 직접 맡은 프리드리히 4세는 아라곤 국왕이자 누이 엘레오노르의 남편인 페드로 4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봉신인 [[아테네 공국]]과 네오파트리아 공국을 [[아라곤 왕국]]에 넘길 테니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 나폴리 왕국군을 축출하고 반란군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드로 4세는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한편, 아테네 공국에서는 아테네 총독 레이먼드 베르나르디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켜 베르나르디를 축출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 왕가의 사생아인 아라곤의 올랜도나 디에고 페데리코를 새로운 대리자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디에고 페데리코를 아테네 공국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 공작의 칭호를 취한 최초의 시칠리아 군주였다.[* 이전까지는 바르셀로나 왕조의 어린 왕자가 이 칭호를 획득했다.] 136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남편이자 공동 국왕인 루이지 1세가 이끄는 나폴리군이 메시나에 상륙해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카타니아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나폴리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였다. 얼마 후 카탈루냐 출신 귀족들이 동원한 용병대가 나폴리군을 격파했고, 루이지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나폴리로 철수했다. 그러나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에 합의된 대로 시칠리아를 앙주 가문의 통치로 되돌려야 한다고 여긴 귀족들이 여전히 건재했고, 프리드리히 4세는 이들을 상대로 긴 내전을 벌였지만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했다. 1373년 3월, 오랜 내전에 지친 양자는 아베르사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자신을 교황과 조반나 1세의 가신으로 칭하면서도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시칠리아의 고대 지명)의 왕으로서 시칠리아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용인되었으며, 자기가 죽으면 유일한 자식인 마리아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가문의 왕족과 결혼하도록 하겠다고 약조했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 4세와 화해하고 1321년부터 바르셀로나 왕조에 가해지던 [[파문]]을 해제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 때처럼 프리드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이 묵살해버리면서 이행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